한아봉사회는,
아시아인과 함께하는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우리의 가까운 이웃
인도차이나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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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선교를 시작한 한아봉사회

 

이글은 1992년 한아봉사회를 창립한 덕암 정봉덕 장로의 회고록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 2016224일 발행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교권 중심지에서 살아오다 보니 기독교의 앞면과 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때로 내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 내가 하는 일을 살피며 그 사이를 조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6.25 전쟁 이후 외국으로부터 받는 구호물자, 복지시설 보조금, 개척 전도비, 여러 명목으로 받는 선교비, 장학금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유럽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비로 받은 각종 지원금 등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만큼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도움과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선교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는, 나눔의 선교에 큰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받은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며 호통을 쳤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계속 제 1세계 교회들에게 에큐메니칼 선교비를 요청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행동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부터 총회 사회부 총무를 마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세계교회의 사랑에 보답하는 나눔의 선교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러나 1989년 총회 사회부 총무직을 사임하고서도 곧 이 일에 착수하지 못했다. 총회 자선사업 재단의 공주원로원 신축비 모금이 시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후 2년 동안 재단일을 돌보면서 차근차근 나눔의 선교회 창립을 준비했다.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은 창립기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1년 봄 독일 개신교개발원조국(EZE, 현재 EED) 한국담당 라인더스박사(Rev. Jan Reinders)가 내한했을 때, 이삼열 교수와 나는 나눔의 선교에 대해 설명하며 개신교개발원조국이 창립기금을 지원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해 가을 라인더스 박사로부터 긍정적인 회답을 받았다. 그때 받은 5천만 원은 한아봉사회의 종자돈이 되었다.  

창립기금이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사역현장에 나가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가 있어야 했다. 나는 김용복 박사, 박창빈 목사와 함께 19911124일부터 125일까지 현장 연구를 위한 스터디 투어(Study Tour of Institutions of Ecumenical Diakonia in Europe)에 나섰다. 

독일의 개신교개발원조국, 브레드 포 더 월드(Bread for the world)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본부, 바젤 미션(Basel Mission, 현재 미션21)본부, 그리고 영국의 크리스챤 에이드(Christian Aid) 세계선교위원회(WMC) 등을 방문하여 자문을 구했다. 그때, 세계교회협의회 개발국(CCPD) 국장이던 오재식 박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을 독일교회는 국가가 받은 종교세의 일부를 교회의 사회봉사 사업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봉사가 국가 시스템 안에 안착되어, 신앙적 접근이 아닌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매우 특별해 보였다.

1992105일에는 유의웅, 윤의근, 노영우, 단필호, 임종빈 목사와 함께 인도차이나 선교현황을 살피기 위해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전 총무인 안재웅 선생의 협조로 태국 방콕에 다녀왔다. 인도차이나 국가들과 한국이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이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을 위해 일하는 메노나이트(Mennonite)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사회주의권에 있는 교회의 현장과 전망에 대해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버마 담당 선교사 맥스(Max Edger), 베트남 담당 카프만(Minh Kauffman), 라오스 담당 분미(Julkiree Boonmee)와의 면담을 통하여 그 지역의 현황과 교회의 실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 준비모임을 통해 탐방에 대한 보고를 하고, 준비위원회를 선정하고, 회의 명칭, 규칙과 취지를 초안해서 총회에 나눔의 선교회 창립을 제안하였다.

19921123, 장충동에 위치한 앰버서더 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회장으로 박종순 목사를 선출했다. 당시 회원은 28명이었다. 창립총회의 중요한 안건 중 하나는 명칭을 정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세우려는 단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점에서 선교단체이지만, 그 성격과 형태가 나눔에 있기에 봉사단체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이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담는 한아선교봉사회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99년 초, 외교통상부로부터 사단법인 등록 허가를 받기 위해 한아봉사회로 개명하게 되었다. 법인 허가를 받기 위한 준비중, 단체명에 선교라는 말이 들어가면 종교 단체로 분류되어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법인 허가를 받으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사유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대외 활동 시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민간단체이지만 외교적 사명까지 감당하는 공식적인 기관이 된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인가가 날 수 있었던 것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대사들이 외무부 장관에게 한아봉사회가 민간외교에 공헌하고 있다는 추천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의 대상으로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로 시작하여 중국과 북한, 그리고 근동지역으로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 가려는 계획이었다. 첫 선교 현장을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정한 중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나눔의 선교 사역에 기꺼이 참가할 수 있는 교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작게 시작하면서 선교 사역의 샘플을 만들어 보자는 의도였다. 그리고 넉넉하지 않은 재정을 생각하여 비교적 선교비가 적게 책정되어도 괜찮을 가까운 이웃 나라를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지도하고 협력할 수 있는 나라면서 사회주의권 국가를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민주화의 경험이 있고, 경제적, 신앙적 자원을 어느 정도 갖추었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을 도울 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의 경험이 중국과 북한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선교는 시도를 했다가 중도에 단념을 했고, 북한선교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한아봉사회 창립 회원인 박창빈 목사가 월드비전을 통해 북한 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이다. 한아봉사회가 그 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박 목사가 그 일을 대신했다고 생각한다.

나눔의 선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네 가지 기본자세를 세웠다. 첫째, 그 나라의 종교에 관한 규정에 따라서 진행하고, 둘째, 한 지역에서 10년 이상 선교하여 신뢰를 형성하며, 셋째, 그 사회의 문화와 분수에 맞춰 계획하고 실시하고, 마지막으로 현장의 생활 문화를 습득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현지와의 관계에서 한아봉사회는 이 기본자세를 지켜왔다. 무엇보다도 현지 사역에서 우리가 가장 조심했던 것은 현지법을 위반하지 않는 것과 어떤 일이든 성령의 역사보다 앞서서 강압적으로 진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간에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사람들이 우리는 예수 믿으면 안 됩니까?” 하고 물어오는 일까지 나타났다.

우리는 장학금 지급과 한국에서의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현지인 지도자를 키우는 일도 진행했다. 미얀마 여성지도자 한명을 한일 장신으로 초청하여 공부하게 도왔고, 캄보디아 청년 한 명에게도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여러 주었다.

그렇다고 한아봉사회의 사역이 실패 없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1996년 베트남 호치민에서 시클로(cyclo) 구매와 양돈사업을 했다가 실패를 경험했고, 캄보디아에서는 에큐메니칼 센터를 한아봉사회가 위탁받아 운영하기로 했다가 사람 관계가 어그러져 취소된 일도 있었다.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튼튼한 사역을 이루어갈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초등학교 건물을 지어 주었고, 라오스에서는 라오복음교회 총무와 태국교회의 라오스 선교 담당자와 연결하여 기술직업 훈련 사업과 학교를 시작했으며, 초등학교 리모델링 사업 등을 진행했다. 캄보디아에서는 당시 CCA 국장인 매튜 조지의 도움으로 현지 지도자들과 모임을 가진 후 사업을 시작했다. 미얀마에서는 미얀마 교회협의회를 시작했고, 당시 총무, 국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협력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972월 류태선 목사와 함께 중국 운남성 쓰마오 지역 위생보건학교에 방문했던 일이다. 애덕기금회 홍콩지부의 서신을 받고 그 지역의 마을 의료인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동참한 지 2년째였다. 보건소도 약국도 없는 산간오지 마을에서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치료하고 돕는 일에 애쓰고 있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부교장을 비롯하여 전 훈련생들이 비행장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해 주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한아봉사회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현지 사역을 진행할 때 현지에 한국인 코디네이터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미 선진국들은 1950년대부터 소위 복음 선교사가 현장에서 철수를 시작해, 국제적으로 선교사란 명칭이 시대에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동역자의 개념을 살리기 위해 선교사 대신 코디네이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국인 코디네이터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베트남의 김덕규 목사 경우는, 이미 청주 상당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을 받아 현지에 있는 분을 한아봉사회 코디네이터로 세워 협력 관계를 맺은 것이다. 다른 경우는 캄보디아인데, 염천교회와 연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긴 후, 1998년 러시아 사할린 선교사로 있던 송준섭 목사가 귀국했을 때 캄보디아 코디네이터로 파송한 것이다.

한아봉사회 회원은 주로 교회이다. 초대 회장 박종순 목사와 박창빈 목사 그리고 내가 속한 서울서노회 소속 교회들의 참여로 시작이 되었고, 그 교회들이 여전히 사역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10만원씩 돕는 선교 모델은 박창빈 목사의 제안이었다. 회비를 10만원으로 하고 15개교회 정도가 참여하면 좋겠다는 제안으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창립 4년만에 교회 회원이 130여 개로 늘어나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가 현재는 회원 수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70여 개의 교회회원과 10여명의 개인회원이 한아봉사회 사역을 돕고 있다. 회원 수는 줄었지만 회비와는 별도로 프로젝트를 위한 사업비를 따로 후원하는 교회들이 여럿 등장했고,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사역은 더욱 넓어지고 활발해졌다. 이러한 한아봉사회의 발전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창빈 목사를 이어 이 일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임하는 서경기 목사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10년간 봉사하고 세대교체를 위해 자진 사임하였다. 나눔의 선교를 실천하는 첫 단체로서, 한아봉사회의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한아봉사회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세계교회가 한국을 도운 것처럼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여러 나라에 받은 것을 돌려주려는 노력을 드러낸 것이 기쁘다.

나는 하나님이 이 나눔의 선교를 매우 기뻐하신다고 믿는다. 더불어 한국교회는 이러한 일을 더욱 크게 감당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도 믿는다. 우리에게는 산업화, 민주화, 교회부흥과 성장이라는 경험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이다. 이 달란트를 묻어 두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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